시베리아 인문기행
행사일 | 2025.04.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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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차 일정 – 4월 19일(토) 이상설 유허비 - 발해성터 – 최재형 고택 - 고려인문화센터 - 신한촌 - 블라디보스토크역
3일차 아침, 우리는 이상설 선생의 유해가 뿌려진 라즈돌노야강(중국명 수이푼강)으로 향했습니다. 헤이그 특사로 더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 선생은 1917년 생을 마감하며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떠나니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뒤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유언대로 그의 유해는 라즈돌노야강에 뿌려졌고, 2001년이 되어서 횃불 문양이 새겨진 유허비가 세워졌습니다. 조국에 돌아가지 못한 한 독립운동가의 의지를 기리는 이 비석은, 독립을 향한 그의 절절했던 마음을 오늘에 되새기고 있었습니다.
이상설 유허비
비포장길을 따라 이동한 뒤 20여 분을 걸어 도착한 곳은 발해의 옛성터였습니다. 이곳은 발해 5경 15부 중 하나인 솔빈부로, 외성 둘레가 20km에 달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습니다. 천연 해자 역할을 하는 라즈돌나야 강이 성 앞을 흐르고, 성 주변 평원에 방목된 말들이 기마민족의 유산을 실감케 했습니다. 흙과 평원이 남긴 흔적에서 고조선-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역사적 연속성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발해성터에서 내려와서 향한 곳은 최재형 선생의 고택이었습니다. 함경도 경원 출신의 최재형은 9살에 지신허로 이주해, 러시아 상선업자에게 입양된 후 세계를 누비며 군납업자로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그가 모은 재산은 현재 가치로 약 300억 원에 달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한인학교를 세우고, 동포 유학을 지원했으며, 독립운동 단체 ‘동의회’와 ‘권업회’를 조직했습니다. 특히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인물로, 안 의사의 가족까지 돌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20년 4월, ‘4월 참변’ 당시 일본군에 체포돼 총살되었고, 그의 시신은 아직도 어디에 묻혔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기념관 안에는 그를 기리는 사진과 기록, 당시 상황을 재현한 유리창과 ‘페치카(벽난로)’가 그대로 남아 있어, 한인의 따뜻한 품이자 독립운동의 후원자였던 그의 삶을 고요히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최재형 흉상 @최재형 고택
우수리스크에서의 마지막 방문지는 고려인문화센터 였습니다. 고려인문화센터는 2009년 한인 이주 140주년을 기념해 세워졌습니다. 내부에는 발해시대 유물부터 한인의 이주사, 독립운동, 1937년 강제이주의 참상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2층에는 태권도와 한국어, 전통춤을 배우는 공간도 마련돼 있습니다. 건물 외부에는 안중근, 홍범도, 유인석 장군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고, 입구 벽면에는 고려인 출신 인물들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세계 최정상 권투선수 게나디 골로프킨과 드미트리 비볼, 록가수 빅토르 초이, 쇼트트랙 선수 안현수(빅토르 안)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고려인 문화센터에는 고려인 이주사와 연해주의 독립운동사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잘 몰랐던 사실이나, 알더라도 두루뭉술 알아오던 이야기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이 있기까지, 독립을 향한 뜨거운 신념과 의지에 대한 조상들의 기록은 가슴 먹먹하게 읽혔습니다.
(*고려인의 역사: 1863년, 함경도 13개 농가가 두만강을 넘어 지신허에 정착하며 연해주 이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애국지사들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모여들었습니다. 1930년대 말, 연해주에는 최대 18만 명의 고려인이 거주했습니다. 그러나 1937년 9월, ‘중앙아시아 강제이주’가 시작되었습니다. 라즈돌로예역에서 기차에 실린 고려인들은 단 며칠 전 통보를 받았고, 짐도 챙기지 못한 채 가축 수송용 화물열차에 실렸습니다. 창문도 없이 허리를 펼 수도 없는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대소변 처리조차 할 수 없던 환경에서 3개월간 이동했고, 이 과정에서 1만6천 명이 사망했고, 도착 후의 기아와 질병까지 포함하면 2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살아남은 이들은 도시 거주가 금지된 채, 맨손으로 토굴을 파고 농사를 지으며 새로운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들은 뼈아픈 이주의 기억 속에서도 생존했고, 오늘날 다시 고향 땅 우스리스크로 돌아와 조상의 땅을 일구고 있습니다.)
고려인 강제이주 및 중앙아시아 도착 후 분산 경로 출처: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2841669
고려인 문화센터 인근에서 샤브샤브로 점심식사를 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였습니다. 셋째날 여정에는 동북아평화연대 김현동 이사장께서 동행하셔서 지난 27년간 동북아 평화 활동의 경과와 향후 계획을 들려주셨습니다. 고려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 건립과 농업이주 정착 지원, 중국 조선족 사기 피해자 연대 활동 등 오랜 세월 이어온 현장의 기록은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기억이 머무는 장소들을 따라 이어졌던 우수리스크 답사는 흙과 물, 유해와 기록, 이름과 무명의 간극 속에서 이 땅에서 고투했던 이들을 다시금 불러보게 하였고, 이어야 할 기억의 끈을 다시 묶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김현동 이사장께서 나누어주신 이야기를 작성해 놓은 글을 공유해주셔서 그 내용을 공유드리니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동북아 27년
0. 10년 숙제 마무리를 위해 2020년 국정감사 증인으로 나갑니다.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3518269601565489&id=100001474522928
1. 프롤로그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3527615290630920&id=100001474522928
2. 중국 여행( 1994) 과 연변조선족자치주 주도인 연길로의 이주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3532248926834223&id=100001474522928 3. 연변 조선족 공동체에 살다 (1996)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3534939869898462&id=100001474522928 4.' 조선족은 한국에 들어올 수 없다' 중국조선족사기피해자협회 (1997)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3538789396180176&id=100001474522928 5.고난의 행군과 중국조선족상조회 (1998)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3540150399377409&id=100001474522928 6. 동북아평화연대와 연해주동북아평화기금 ( 1999 - 2001 )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3541750585884057&id=100001474522928
7. 동북아 코리안네트워크를 구축하자 (2001 - 2008)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3544771765581939&id=100001474522928
8. 고려인 이주 140주년과 연해주로의 이주 ( 2004년)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3547798695279246&id=100001474522928
9.고려인이주 140주년 기념관 건립과 건립추진위원회(2004 ~ 2009)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3547927895266326&id=100001474522928
10.농업이주정착지원사업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3549083838484065&id=100001474522928
11.동북아인을 양성하자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3560672577325191&id=100001474522928
12. 코리안에서 연대, 평화, 다민족으로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3562199483839167&id=100001474522928
13.고려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 준공식과 재외동포재단의 만행, 그리고 이어진 입국거부(2009 - 2010)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3555891547803294&id=100001474522928
13-1.<고려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의 역사적의의 >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3559342364124879&id=100001474522928
14. 사회적기업 바리의꿈과 연해주동북아평화기금, 그리고 환동해 (2011~2015)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3568073489918433&id=100001474522928
15.NonGMO 압착 콩기름 콩단백 : 연해주 콩이 고려인의 희망이자 우리의 바리의꿈이고 평화였다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3569641799761602&id=10000
16.10년 이면 강산도 변한다 <10년만의 귀환> https://www.facebook.com/kimhyundong62/posts/3573739226018526
17. 새로운 10년 무엇을 할 것인가? https://www.facebook.com/kimhyundong62/posts/3574421339283648
우수리스크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습니다. 창밖으로 펼쳐진 연해주의 들판은 점차 도시의 윤곽을 드러냈고, 우리는 이날 오후, 한때 ‘극동의 파리’로 불리던 이 항구 도시의 역사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신한촌 기념비였습니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주한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 외곽의 황무지를 개간해 세운 마을 ‘신한촌’. 이곳은 단순한 정착지를 넘어, 해외 독립운동의 거점이자 임시정부 이전의 구심점이었습니다.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 대한국민의회가 이곳에서 활동했고, 김구, 이상설, 이동휘, 안중근, 이범윤 등 수많은 이름들이 이 신한촌의 중심에서 역사를 함께 엮어냈습니다.
지금은 공원 속에 조용히 자리한 기념비 앞에 서자, 먼 시간 속 이야기가 바람을 타고 전해졌습니다. 고난과 희망이 교차하던 땅 위에 남은 흔적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 기억을 되새기는 작은 의식을 치르듯 조용히 발길을 멈춘 뒤 묵념을 하였습니다. 이후 우리는 도심으로 향했습니다. 아르바트 거리에서 잠시 머무르며 커피를 나누고,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분주한 도시의 한가운데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블라디보스토크역. 이곳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시작점이자 종착역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9,288km 철로의 출발선입니다. 1891년 알렉산드르 3세의 명으로 건설이 시작되어 1916년 완공된 이 노선은, 단순한 철도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역은 황량한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모스크바까지 연결된 길의 첫걸음이며, 제국의 확장, 이주의 경로, 그리고 현대 러시아의 형성을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플랫폼에 서자, 발길 닿지 않은 끝없는 대륙이 상상 속으로 이어졌습니다. 철로 위를 달려간 무수한 이주민들과 여행자, 상인과 군인들의 발자취가 겹쳐지며, 이곳은 하나의 거대한 여정의 문턱처럼 느껴졌습니다. 항만과 철도를 둘러본 뒤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로 향했습니다. 쏟아지는 비로 오르막길은 쉽지 않았지만, 정상에 다다르자 비에 젖은 도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회색 하늘 아래 번지는 항구의 불빛과 젖은 지붕들, 멀리 이어지는 철로와 바다의 윤곽이 겹쳐지며 또 하나의 장면이 마음속에 새겨졌습니다.역사와 도시의 경계에서, 우리는 독립운동의 과거와 디아스포라의 현재를 함께 걸었습니다. 낯선 도시가 낯설지만은 않게 느껴졌습니다. 이국의 거리마다 서린 조상의 기억이,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조용히 되새기게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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